[첫화면으로]Diary/말하는순서

마지막으로 [b]

/말하는순서

2005-3-7

이야기 하나

주로 말장난할 때 써먹는 말이지만, 흔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지"라고들 하는데... 가끔은 그 "끝까지 듣기"가 참 힘겨울 때가 있다.

군대에 있을 때, 막사 주변과 부대 내의 높은 곳, 주요 건물들 근처에는 두 명 정도가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초소나 참호들이 있어서 훈련 때(실제 전쟁 때도 그렇겠지)는 각자가 자기가 맡은 자리에 들어가서 경계를 하게 되어 있다.

근데 문제는 자기가 들어갈 곳이 어디인지가 매번 훈련 때마다 바뀐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그 자리 배치를 훈련 전날 한번 읊어 주고 끝이라는 거다. 그 때 잘 듣고 외어야 한다. :-/

훈련 전날, 일과를 마치고 내무반에서 TV를 보고 있을 때 FDC1 분대원 한 명이 배치 계획도가 적혀 있는 커다란 판때기를 들고 들어온다. 그러면 병장 밑으로는 뻣뻣이 자세 잡고 앉아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자기가 어디에 배치될지 듣는다. 다 불러 준 후에 만만한 일이등병에게 "너 어디야?"하고 물어서 대답 못하면 좋은 꼴 안 날테니 어떻게든 한 번에 잘 듣고 외워야 하는데...

이놈의 FDC 인간이 꼭 이렇게 읊는다.

"... 탄약고 홍길동 홍판서, 차량호 고길동 고철수, 창고뒤 손오공 저팔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면, 다음의 경우와 비교해보라.

"... 홍길동 홍판서 탄약고, 고길동 고철수 차량호, 손오공 저팔계 창고뒤..."

첫번째의 경우, 자기의 이름이 들리는 시점에, 자기가 배치된 장소는 이미 불려진 다음이다. 즉 자기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자기의 이름 앞에 불려진 장소를 기억해 내야 한다. 위의 홍판서 고철수 저팔계처럼 운이 없는 경우는 자기 이름 "앞에 앞에" 불려진 장소를 기억해야 한다. 자기 이름이 전체 목록의 전반부에 있을지 후반부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체 인원은 100명이 넘는데, 그 이름을 다 부르는 동안 자기의 이름이 언제 불릴지 모르니 계속 긴장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수업 시간에 출석부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스릴넘치는 -_-; 상황이랄까.

두번째의 경우는, 상상만 해도 알 수 있겠지만, 훨씬 편하다. 원래 사람이란게 주위가 소란스럽거나 자신이 딱히 집중하고 있지 않더라도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쉽게 귀에 들어온다. 일단 자기의 이름이 귀에 들어오면, 그 순간만 더 집중해서 이어지는 단어를 들으면 된다. 그러니 괜히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배치 장소를 들으면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을 나 말고도 남들도 했을텐데, 어찌된게 매번 훈련 때마다, 읊어주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 (주로 FDC분대장이나 좀 짬밥있는 상병이 하던데)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게 시켰나 싶을 정도.

"모든 FDC분대원이 내 후임병이 되었을 때 꼭 한 마디 해 줘야지"라고 다짐을 했었는데 그래서 나중에 내가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이야기 둘

주인장과 아내 Zehn02가 얘기를 나누다보면, 주인장이 "결론부터 말해주면 안 돼요?"라고 말을 끊을 때가 종종 있다. Zehn02양 입장에서는 한창 말을 하고 있는데 말은 말대로 끊기고, 결론부터 얘기하라는 말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재미없다는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는 터라 기분이 상할 터이고, 주인장 입장에서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상대방이 기분이 상하니 머쓱해진다. 그러고보면 영화든 소설이든 결론부터 얘기하고 시작하는 경우는 없고, 주인장이 얘기를 할 때도 결말을 뒤로 끌면서 장황하게 서두를 꺼내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어째서 자기가 남의 얘기를 들을 때는 그런 것을 답답해하는 걸까 의아해하고, 요새는 그렇게 말을 끊지 않도록 주의하는 편(이건 주인장 생각이고, Zehn02양 쪽에서는 요새도 마찬가지일 수도)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Zehn02양의 말은 다음과 같이 흘러갔다.

내일 아침에 학교에 일짝 가야 되느냐?
요새 핸드폰이 좀 이상하다 싶었다.
차에서 핸즈프리를 써서 통화를 하다 보니 몰랐다.
벨소리는 잘 들렸다.
등등...

결국은 주인장, 참지 못하고 "결론부터 얘기해주면 안 될까요?"하고 물었다. Zehn02양은 "좀 있으면 결론인데.."하면서 토라짐. (여보야 미안~) 결국 결론은 "핸드폰의 마이크와 스피커가 이상하다"인데...

주인장 입장에서는, 핸드폰이 문제가 있으니 A/S점에 다녀와 달라는 것이 핵심 같은데, 그렇다면 A/S를 가기 전에 문제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싶어진다. 그래야 A/S 기사에게 설명하기도 쉽고, 사용자 앞에서는 안 되다가 기사 앞에서는 잘 되어서 당혹스러워지는 것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엔지니어의 천성 탓인가..) 그러니 주인장은, Zehn02양이 생각하는 문제의 결론을 먼저 듣고, 그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조건을 덧붙여서 그 때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핸드폰이 마이크도 안 되고 스피커도 안 된다"라는 결론을 먼저 듣게 되면 주인장의 머리속에서는 이런저런 테스트 조건들이 떠오를 것이다.
  •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만 안 되는 것인지 항상 안 되는 것인지.
  • 통화할 때의 소리만 안 들리는 것인지 벨소리나 다른 소리도 안 들리는 것인지,
  • 이어마이크나 핸즈프리를 쓰면 되는지 그때도 안 되는지
이런 식으로 조건들을 머리속에 떠올리고 Zehn02양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서 조건을 소거하거나 새로운 조건을 떠올리거나 할 것이고, 말이 다 끝나고 나면 머리속에 남아 있는 조건들을 테스트해보고 정리를 할 것이다. (이번 경우에는 Zehn02양이 모든 경우를 다 테스트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할 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위의 실제 대화에서는 결론을 아직 듣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인장 입장에서는 휴대폰이 스피커가 안 된다는 것인지, 마이크가 안 된다는 것인지, 전화가 안 걸린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결론보다 앞에 나오는 각각의 진술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채로 (물론 어느 정도 듣다보면 결론도 짐작이 되긴 하겠지만), 어느 것도 소거하지 못한채 전부 다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그 "결론보다 먼저 나오는 진술들"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인장 쪽에서는 정말 곤혹스러워지는 것이다. 위의 군대 얘기와 동일한 상황으로 느껴진댈까.

그리고 결론을 듣게 되면 그제서야 앞서 들었던 얘기들을 가지고 정리를 해야 하는데, 앞서 들은 얘기를 전부 기억하지 못하면 상대방이 이미 했던 얘기를 다시 되물어야 한다. ("핸즈프리로 할 때는 어떻다고?" 등.) 이렇게 되면 첫째로, 상대방의 얘기를 제대로 안 들은 것처럼 느껴져서 미안해지고, 둘째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에서 했던 얘기를 다시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

Zehn02양의 입장이 되어 보면, Zehn02는 당연히 주인장이 휴대폰을 고쳐 주기를 기대하지야 않았을 테고, 애초에 그렇게 문제를 명확히 정리해서 A/S 기사 앞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주인장이 들어 주고,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주인장이 자기의 휴대폰을 대신 가져가서 수리를 맡겨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얘기가 끝난 후, 했던 얘기를 다시 반복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부부 사이에 일상적인 대화의 연장일 뿐 딱히 비효율적인 반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지 모른다. 뭐 본인에게 확인하지는 않았으니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것은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의 차이일까, 공대생의 특성일까, 아니면 단지 주인장이 이상한 걸까?

이야기 둘의 후속

"이야기 둘"에 적은 내용은, 남들이 보면 별 게 아닐지 모르겠는데 주인장은 뭔가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느낌이다.

결론을 추측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 여흥 또는 풀어야 되는 문제(라기보다는 퀴즈?)가 되는 상황에서는 서론부터 듣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으나, 결론을 가지고 뭔가 다른 것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되면 빨리 결론부터 듣고 다른 얘기들은 보조 데이타로 처리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굳이 내가 해결해야 되는 일이 아님에도, 또는 상대방이 내게 해결을 기대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해결해 주길 기대한다고 착각하고 해결하려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겠다. (이것은 "화성 남자.."에 나오는 얘기 그대로로군.)


  • Zehn02 : 흥!! - 2005-3-8 8:00 pm
  • Raymundo : 헉, 삐졌다... - 2005-3-8 8:01 pm
  • Zehn02 : 흥!! 이라고 썼다고 빠직 해 놓구선.. - 2005-3-8 8:24 pm
  • Raymundo : ^^;; - 2005-3-8 9:19 pm
  • HaraWish : 에에... 아직 1년도 안 된 커플 생활이라,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 기분이긴 한데요. 저도 Raymundo님 같은 경우가 많았거든요. 말 자르고, 간단히 얘기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고. --;;; '화성남자금성여자'류에서 많이 나오니까 진단은 넘어가고. 제 경우에는 제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더라도(알고보니 상대방이 기대조차 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OTL) 그냥 그 문제해결과정을 자신의 문제인양 같이 하는 게 상대가 바라는 거구나...를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됐어요. 그래도 여전히 '너무 남의 문제처럼 생각해~'라는 핀잔을 듣긴 하지만요. ^^ - 2005-3-9 2:50 pm
  • Raymundo : HaraWish/ 내 문제로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한데요 ^^ 애초에 "문제와 해결"의 구도가 아니라 그저 대화와 공감이 중요한 것 같은데, 4년이 넘어도 잘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 2005-3-9 5:0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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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Fire Direction Center. 사격지휘소. 목표의 위치와 지형, 풍향풍속 등에 따라서 포의 발사각 등을 통제하고 기타 등등 하는 곳.. 이 "FDC"라는 명칭이 생각이 안 나서 제대 8년만에 드디어 좀 잊혀지나 싶었는데 좀 전에 갑자기 기억이 났다. -_-

마지막 편집일: 2012-2-11 12:25 a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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