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Diary/기숙사에서전화받기

마지막으로 [b]

/기숙사에서전화받기

주인장이 학부 1학년 때 기숙사 신세를 졌는데, 저 글을 보고 생각난김에 적어 봅니다.

그 때는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고... 기숙사 방마다 따로 전화를 신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전화를 걸 때는 매점 앞과 각 동 입구에 하나씩 있던 공중전화를 이용했었는데, 문제는 전화를 어떻게 받는가. 이게 참 재미난 구조로 되어 있더라고요.

각 동에는 경비아저씨 두 분이 날마다 교대로 밤 12시까지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건물 입구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서 거기 앉아 계셨죠. 책상에는 전화가 하나 놓여 있어서 그게 그 동의 대표전화였습니다.

아저씨가 앉아있는 자리의 맞은편 벽에는 커다란 나무판에 그 동의 각 방 호수들이 적혀 있고, 호수마다 식권 크기의 아크릴판 두개가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학생들이 현재 기숙사에 들어와 있는지 외출 중인지를 알리는 표식인데요. 2인 1실 구조라서 학생들은 입주할 때 A 또는 B로 책상과 침대를 배정받습니다. 만일 제가 "302호B"로 배정을 받았다면.. 아침에 수업 들으러 갈 때는 그 표식을 외출 쪽으로 돌려놓고, 돌아왔을 때는 반대로 다시 돌려놓는거죠. 외출/재실 표시가 따로 되어 있는 건 아니고, 아크릴판 한쪽 면에는 커다랗게 "A(또는 B)"라고 적혀 있고 다른 면에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데, 글자가 보이게 두면 들어와 있는 거고 안 보이게 두면 외출 중이었습니다. 또 A와 B가 아크릴판 색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빨강 하나는 노랑) 아저씨가 봤을 때 확인이 쉽게 되어 있었죠.

그 다음, 각 층마다 계단 앞에 수신 전용 전화기가 있었습니다. 다이얼이 아예 안 달려 있고, 전화가 왔을 때는 소리도 안나고 (전화올 때마다 소리가 나면 너무 시끄러울테니) 빨간 램프만 깜박거리는 전화기였죠. 마지막으로, 각 방마다 스피커가 하나씩 달려 있어서 경비아저씨가 마이크로 공지 같은 걸 전달하거나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 이제, 실제로 전화를 받는 과정을 묘사해 보면,
  • 제가 친구에게 제 전화번호를 알려주겠죠. "000-0000 가 102동 전화번호니까, 여기 걸어서 아저씨에게 302호 홍길동 바꿔달라고 그래"
  • 친구가 102동에 전화를 겁니다. 경비아저씨가 받으면 "302호 홍길동 바꿔주세요"하겠죠.
  • 경비아저씨는 책상에 놓인 사생 명부를 쓱 보고 제가 "B"인 것을 확인한 후, 맞은편에 걸린 표식판을 보면서 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합니다. 없으면 뭐 없다고 하면 그만이고...
  • 제가 방에 있으면, 아저씨는 3층에 있는 수신전용 전화에 할당된 번호를 친구에게 불러줍니다. "000-3333으로 다시 거세요~" 그러고 뚝! 끊어버립니다.
  • 그러면 제 친구는 다시 000-3333으로 전화를 걸 거고,
  • 한편 아저씨는 302호 스피커의 스위치를 켜고 "302호 홍길동 학생~ 전화받아요~" 하고 한두번 말해줍니다.
  • 그럼 저는 부랴부랴 계단 앞에 있는 수신 전용 전화기 앞으로 갑니다.
  • 수신 전용 전화기에 불이 깜박거리면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받습니다.
이렇게 복잡하지만 나름 꽤 합리적으로 보이는 과정을 거쳐서 친구와 저의 통화가 극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막상 생활해보면... 이런저런 연유로 난감한 경우가 생기는데,
  • 저 절차를 제대로 설명을 하고 상대방이 센스있게 잘 이해를 한 상태면 괜찮은데, 보통은 말하기가 복잡하니 대표번호와 호수 정도만을 알려주죠. 그럼 친구가 전화를 걸어서 "302호 홍길동 바꿔주세요" 그랬는데, 친구 입장에서는 "잠시만 기다려요~" 후에 제가 나타날 거라 기대를 했는데, 갑자기 뜬금없는 전화번호를 휙 불러 준 후에 전화가 끊겨버린단 말이죠. (친절한 아저씨는 설명을 잘 해주기도 하는데... 보통은 오는 전화가 많고 바쁘시다보니...) 그러면 전화를 건 친구는 방금 들은 번호를 미처 외우지 못해 또 대표전화로 걸든가, 번호를 잘못 알아들어서 엉뚱한 곳에 걸었다가 다시 대표전화를 걸든가 등등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진행되면...
    • "이게 뭐야 뭐 이리 복잡해 나 안해!"하고 전화통화를 포기하기도 하고 -_-;;
    • 그 와중에 수중에 동전이 (거는 쪽에서도 공중 전화를 이용할테니) 다 떨어져 버려서 -_-;;; 더 이상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딱 한 통화를 할 동전밖에 없는 상태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새로운 번호를 받고 전화는 끊겨버리면...
    • 그 친구는 "나중에 전화하지 뭐"하고 가버렸는데 정작 저는 수신용 전화기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는 경우도 생기죠;;
  • 외출/재실 표식을 제대로 돌려놓는 걸 잊었을 경우 - 방에 있는데 없다고 되어있으면 뭐 당연히 못 받는 거고... 반대로 방에 없는데 있다고 되어 있으면 친구는 하염없이 수신전용 번호로 전화를 걸지만 받아줄 사람이 없겠죠. 그래서 건물 입구를 오가는데 표식을 제대로 안 돌려놓는 모습이 발견되면 아저씨에게 야단맞습니다. ^^;
  • 표식은 제대로 해놨는데, 다른 방에 놀러가 있는 상황인 경우 - 이 때도 전화를 건 친구는 "왜 안 받아?" 궁시렁거리면서 기다릴 뿐... 가끔 지나가던 학생이 전화기가 깜박거리는 걸 발견하면 대신 받아서 "홍길동씨 전화받아요~~"하고 소리쳐주거나, 전화를 건 사람에게 이쪽 사정을 설명하고 나중에 다시 걸라고 알려주기도 합니다.
  • 같은 층에 있는 다른 학생이 이미 전화를 받고 있는 경우 - 같은 층 학생이 나보다 먼저 전화를 받고 통화중인 경우, 제 친구가 아무리 수신전용 전화로 걸어도 통화중이겠죠. 보통은 통화 중에 자기 뒤에 다른 사람이 와서 기다리면 배려차원에서 통화를 마무리하고 끊어주긴 하는데, 뒤에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말거나 한참 더 통화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친구 입장에서는 계속 통화중이니 포기하고 가버리는데, 저는 알 수가 없으니 전화기 앞에서 어슬렁대며 좀 더 기다려봐야 하죠.

여기에 추가로, 기숙사의 전화 매커니즘(?)이 익숙해질 무렵이 되면 이걸 응용하는 학생들이 나타납니다. 아저씨는 12시까지만 근무를 하시니까 (더 일찍 끝내셨던가? 기억이 가물..) 그 이후에는 어차피 전화가 와도 받을 수 없고, 각 층에 있는 수신용 전화는 놀게 되죠... 그래서,
  • 미리 상대방에게 "새벽 1시에 000-3333로 걸어라"하고 약속을 해 두고, 1시에 3층 전화기 앞에서 대기하다가 전화를 받는 식으로 통화를 하는 학생들이 생깁니다. 주로 상대는 여자친구겠죠. 술 먹다가 그 시간쯤에 기숙사에 들어가다보면, 층마다 추리닝에 슬리퍼 신고 벽에 기대어 전화받는 모습, 다리가 아픈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서 통화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죠. 옷차림이나 자세는 완전 노숙자 아저씨인데 얼굴에 가득한 미소와 나긋한 목소리는 모 디자이너 선생님 같은..
  •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기는데... (짐작하시겠지만) 한 명은 1시 반에 전화를 받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시간에 가봤더니 1시부터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더라, 앞사람이 한시간 심지어는 두시간 넘게 통화를 하고 있더라, 제일 황당한 경우는 두 명이 똑같이 1시에 전화 약속이 되어 있다 등등.. 그렇다고 해서 자기쪽에서 연락을 하자니 여자친구 집에 새벽 한시에 전화해서 부모님 다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이런 식으로 충돌이 생기죠. 예의바른 사람들끼리 만나면 각자 자기 여친에게 사정을 얘기해서 짧은 시간 동안 번갈아 한번씩 통화를 한 후 한 명은 다른 층의 전화를 이용한다던가 하기도 하겠습니다만... 어떤 때는 싸움이 나기도 하고... -_-;

이제는 학교 앞 서점에 있던 메모판도 사라진지 오래이고, 기숙사의 경우는 한 때는 방마다 따로 전화를 신청해서 둘 수 있게 되었던 걸로 압니다만, 이제는 오히려 그걸 신청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겠죠. 통화는 휴대폰을 쓰면 되고, PC통신을 하기 위해 전화선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저런 식으로 친구의 전화를 받았던 게 이젠 가물가물한 추억이 되어버렸군요. 그 친구들 잘들 살고 있나 모르겠네요. :-)
-- Raymundo 2009-6-21 4:4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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