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마음의편지

마지막으로 [b]

군대 에피소드 세번째 이야기.

병장 무렵에 대대장이 바뀌었는데 (즉 성년의날이나 설날의비디오 에피소드의 대대장의 후임자이다), 새로 온 대대장이 제일 강조하는 게 구타나 자살 등의 사고 근절이었다. 당시 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그랬던 듯 하다. 덕분에 당시 영창 내지 군기교육대로 끌려가는 고참들도 부쩍 늘었다.

애당초,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을 잡아와 가둬놓고 부려먹는 것이 문제의 근원이거늘... 거기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이런 저런 대책을 내어놓는데 그 중에 하나로, 식당 벽에 "마음의 편지"라고 적힌 편지함이 하나 달렸다. 거기에 편지를 쓰면 대대장이 직접 읽어 보겠단다..

가끔씩 다 모아놓고 적게 하는 '소원수리'도 그렇지만... 글을 적어 거기에 넣으려면 몇 백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텐데.. 어느 누가 튀고 싶어 미치지 않은 이상 거기에 뭔가를 적어 내겠는가. 당연히 전혀 호응 없다.

그렇게 한두 주 지나고, 어느날 포대원들을 다 모아놓더니만 한 사람이 한 장씩 기명으로 써서 내란다. -_-;;

...

그런데 그 며칠 전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주인장이 수송부 신병들 모아놓고 운전 교육을 하고 있었다. (사회에서는 주인장보다 운전 경력도 많고 실제로도 훨씬 잘 할 인간들이고, 주인장 실력에 남을 교육한다는게 우스운 일이었지만, 뒤에 커다란 포 - 운전교육 때는 자그마한 트레일러 - 를 달아놓고 후진을 하는 것은 그냥 후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서 먼저 들어온 인간이 아무래도 더 잘 하기 마련이다)

근데 신병 한 명이 아무리 말을 해도 핸들을 엉뚱하게 꺾는 바람에 트레일러 연결 부위를 부러뜨릴 뻔 하는 등 속을 썩이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천천히 친절하게 바로잡아 주었을 법도 하지만, 사격과 마찬가지로 사고로 직결되는 사안인데다가 당시에는 주인장 역시 정서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터라... 운전석 옆에서 소리를 꽥 지르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들어 머리를 몇 대 내리쳤다.

그러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멀리서 웬 아저씨가 개 한 마리 데리고 어슬렁 걸어오는 거다.. 대대 안에서 개를 데리고 지휘봉 들고 뒷짐지고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이 대대장 말고 누가 있겠는가. 퍼뜩 차에서 내려 같이 있던 사람들을 정렬시킨 후에 커다란 소리로 경례를 했다.

경례를 받고 그냥 가 주면 고마우련만, 우리 자상하신 신임 대대장님,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어느 포대냐, 뭐하는 중이냐, 운전 교육은 어떤 식으로 시키냐 등등을 묻는다. 이리저리 대답하고 나니 옆에 있는 신병에게 다가가서 만면에 웃음을 띄며 말을 건다.

 대대장 : "김XX 이병, 지낼 만 한가?"
 김XX : "네 그렇습니다!"
 대대장 : "운전 교육은 받을 만 하고?"
 김XX : "네 그렇습니다!"
 대대장 : "교육 받다 몇 번이나 맞았나?"
 옆에 있던 주인장 : -_-;;;;;;;

눈 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간사한 대대장..부드럽게 말을 건 후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화제를 구타로 몰고 간다. 그것도 "맞지는 않았는가?"도 아니고, '하다 보면 맞을 수도 있는 거지 뭐'라는 뉘앙스로 슬쩍 "몇 번이나 맞았냐"란다. "별로 안 맞았습니다"라도 주인장은 바로 영창으로 갈 상황... 결국 전역을 두어 달 남겨놓고 오점을 남기는구나..싶었다.

 김XX : "맞은 적 없습니다!"

오옷, 원래 이등병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보니 깊이 생각해서 대답하기도 힘든데, 우리 막내, 사회에서도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술 마시며 살았다 하더니만... 그렇지만 대대장도 만만치 않다.

 대대장 : "안 맞긴 임마, 내 다 아는데... 못하면 고참들이 툭툭 때리잖아."
 김XX : "아닙니다!" (장하다 우리 막내)
 대대장 : "아니긴, 모자로 얼굴 툭툭 치고 안 그래?" (-_-;;; 이 아저씨.. 본 건가?)
 김XX : "안 그렇습니다!"
 대대장 : "... 그래? 나중에라도 맞고 그러면 숨기지 말고 간부들에게 말하고 그래라"

그리고는 가 버렸다. 정말,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는 줄 알았다.

그래, 분명히 내가 때렸다. 훈련 나가서 핸들 한 번 잘못 돌리면 몇 명이 다리가 부러질 지 모르고 몇 천 만원인지 몇 억인지 할 포를 망가뜨릴 지 몰라서 똑바로 하라고 때렸다. 20년씩 굴리다보니 브레이크액이 줄줄 새는 차를, 부품을 안 내주어 파이프 하나 교체하지 못해 검정테이프로 둘둘 막아가며 다니는 것이 서러워서 때렸다. 점화플러그 하나를 주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본네트를 열어 점화플러그를 뽑아 기름을 닦고 사포로 갈아주어야 하는 게 화가 나서 때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 괘씸한 수송관과 그 밑에 똘마니 하사관들을 패고 싶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니네 간부들 다 쏴 버리고 뛰쳐 나가고 싶었지만, 내 신세 망치긴 싫고 스트레스는 쌓이길래 치사한 거 알면서도 죄없는 후임병들, 똑같은 신세의 불쌍한 후임병들에게 손찌검하고 말았다.

막내가 "맞았습니다!"했어도 내가 할 말이 없고, 군기교육대를 보내든 영창을 보내든 변명할 여지도 없고, 내가 다 잘못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병장들 앞에서는 자네들을 믿네, 자네들이 부대를 잘 이끌어 주길 바라네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방금 전까지 내 앞에서 미소를 띄고 수고가 많네 열심히 하게 했으면서, 바로 고개를 돌려 이등병에게는 "쟤가 너 때렸지?" 하고 묻는 건 너무하지 않느냔 말이다.

...

한 통씩 쓰라길래, 그래서 그 때의 일을 썼다. 사실, "그래 내가 때렸소"라고 쓰고 싶었지만, 그건 못 썼고... (-_-;; 나도 결국 속물) 그 날의 앞뒤 상황을 적으면서 "기억하냐, 정말 서러웠다. 댁이 우릴 안 믿어주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믿고 살겠는가" 라는 식으로 적었다. 몸조심하며 살아야 할 말년에 괜한 짓 하나 싶기도 했고, 지금 생각하니 어느 정도는 적반하장인 상황이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때린 건 사실이니) 그 당시는 정말 서러웠었던 듯 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대대 정비소에 가서 차들 정비하다 저녁에 올라오는데 지나가던 행정병들이 날 보더니 대대장이 부대에 왔다가 나를 찾았단다. 사병들 모아놓고 마음의 편지들에 대해 자신의 답변을 해 주다가 내 이름을 거명하며 편지 아주 잘 읽었다고, 나를 불렀는데 자리에 없으니 포대장보고 포상휴가 보내주라고 했단다.

아아... 두 번이나 참 어이없게 포상휴가를 받아 챙겼는데, (위에 적은 두 에피소드 참조) 이제 다시 이렇게 받아먹는가. 세번째 이러고 나니 기쁘기는 커녕 허탈할 지경이었다. 전역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사고도 나고 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터라 그 포상휴가는 결국 챙기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군대의 기억도 아련해졌지만, 교육장에서의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 때, 인간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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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10-27 8:56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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