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설날의비디오

마지막으로 [b]

96년 설 연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군대에서도 빨간 날은 쉬는터라 (주인장이 속한 수송부는 항상 작업할 거리가 쌓여 있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만) 하루종일 주황색 추리닝 차림으로 어그적 거리고 있었는데, 첫날 오후에 대대 정훈과에서 비디오를 틀어준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 입장에서야 재밌는 영화 같은 거 안 봐도 좋으니 가만히 놔두는 게 더 기쁜 일이지만, 모이라니 별 수 있나. 포대원들 모두 한쪽 내무반에 TV 를 향해 앉아 있는데, 행정병으로부터 날벼락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연휴 첫날과 둘째날 각 한 편씩을 틀어 주는데, 보고 나서 감상문을 써내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왔단다. -_-; 백 몇 십명의 포대원이 죄다 감상문 같은 것을 쓰기도 뭣하거니와 병장들은 후임병을 시킬 것이 뻔하기에, 포대원들끼리 쑥덕대어 분과 별로 두 명 정도만 내어서 구색을 갖추자..고 합의가 되었다.

당시 주인장은 한창 이런 일을 책임지고 할 상병이었기 때문에, 수송부의 할당량 두 편을 책임져야 했는데, 한 편은 직접 쓰기로 하고, 또 한 편은 당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들 군번에게 시켰다.

 주인장: "막내야, 오늘 하는 거는 내가 하나 쓸 테니, 내일 틀어 주는 
          영화 보고 나서 적당히 종이 한 장 정도 대충 채워서 내라, 알았니?"
 박 모 이등병: "예,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말은 하지만 싫은 표정이 역력.. 하기야 다들 초등학교 때 정도나 독후감 숙제다 뭐다 해서 내지, 이 나이에 누가 이런 걸 하고 싶겠는가.

어쨌거나, 비디오가 상영되었는데 첫 날은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둘째 날은 스티븐 시걸 주연의 '언더 씨즈2'... 알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막내에게 참 미안하게 되었다. '브레이브 하트'야 그 내용이 군인이 감상문 쓰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었지만, 도대체 언더 씨즈를 보고 무슨 감상문을 쓰란 말인가. (다들 열심히 태권도를 연마하여 불의에 맞서 싸우자..-_-;)

그렇게 설도 지나가고 감상문도 제출하고... 그런데 며칠 후 저녁에 당직 병장이 와서 한다는 말이 포상 휴가가 나왔다는 것이다. 사연인 즉슨, 그 비디오 감상문을 내라는 지시를 다른 포대에서는 죄다 무시해 버렸는데 (그럴 만도 하지) 오직 브라보 포대 (보병 부대는 1,2,3,본부 중대, 포병 부대는 알파,브라보,찰리,본부 포대가 한 개의 대대를 이룬다) 에서만 열심히 써서 제출했던 것이다. 이에 분개한 대대장이 가로되, "감상문 제출한 사람들 전부 포상휴가를 주도록 하여라"였다나 뭐라나...

이리 하여 주인장은 성년의날의 그 휴가에 이어서 또 한 번 어이없는 (물론 기분은 좋지만) 휴가를 얻었고, 그 때 마지 못해 썼던 우리 막내는 첫 휴가에 5일을 합쳐서 신나게 다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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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5-21 3:10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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