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홍세화 ㅣ 한겨레 기획위원 (한겨레 김창광 기자)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온 이 명제는 분명 참인 명제다. 노동자란 존재는 노동자의식을 갖게 하고 농민이란 존재는 농민의식을 갖게 하며, 자본가란 존재는 자본가의식을 갖도록 한다. 과거의 노동운동가도 일단 국회의원이 되면 국회의원의 일상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의식을 갖는다. 그렇게 참인 이 명제는, 강고한 국가주의 교육이 관철된 한국사회에서는 결코 참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진보운동은 이 명제의 덫에 걸려 있었다. 진보운동세력이 자주 꺼내는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은 각기 그 존재에 상응하는 의식이 있거나 가져 마땅하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진행된 사회구성체 논쟁도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잘 알고 있듯 1300만 노동자, 400만 농민의 대부분은 노동자의식·농민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노동자의식·농민의식을 갖고 있는 사회구성원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명제를 자주 끌어들였다. 그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천착하기보다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면서 자족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라는 점과 아울러 사회구성원들이 사회경제적 처지에 비교적 상응하는 정치사회의식을 갖는 유럽의 사회현실을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울산에 자리잡은 대기업에 근무하는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자’보다 ‘영남’, ‘대기업’, ‘남성’에 일치시킨다. 자본이 남성·여성, 정규직·비정규직, 내국인·외국인 노동자의 구별과 차별을 통해 노동분열을 쉽게 얻는 것도 노동자의식 결핍과 크게 연관된다.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야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민족모순·계급모순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민족적·계급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 점에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존재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관철된 국가주의 교육은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신의 민족적·사회경제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작용했다. 반공교육과 체제순응 교육, 복장·두발 단속, 훈화, 애국조회, 국민교육헌장 교육과 국가경쟁력 강조 등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한 반면, 현대사 교육을 비롯한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 결과, 노동자의식·농민의식을 갖기는커녕 거꾸로 노동자의 존재, 농민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했다. 사회화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게 교육과정이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회구성원은 자신을 되돌아보라. 노동자의식·농민의식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은 제도교육과정을 통해 일찍부터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가 참명제가 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이 사회에서 국가주의 교육을 배제하는 일은, 사회구성원들이 이미 갖고 있는 의식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그 만큼 중요한 과업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의 의식을 바꾸는 일은 무척 어렵다.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임에도 사람들은 일단 형성된 자신의 의식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 점은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서민에게 구독을 중지하도록 설득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설득작업은 실로 불편하고 어렵고 더디다. 진보가 불편하고 어렵고 더딘 것과 같다.
예컨대 안티조선운동은 양쪽에서 비판·비난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개량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이념적 선명성을 드러내고, 다른 쪽에선 사회구성원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비난한다. 신문을 선택하는 것도 선택자의 의식에 따른 것이라 할 때, 사회의 진보나 변화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진보나 변화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할 때, 자신의 이념적 선명성을 자랑하면서 ‘개량주의’ 운운하는 ‘편리함’을 좇는 사람은 부디 <조선일보>를 구독하는 서민 한명이라도 구독을 중지하도록 노력하는 불편함을 택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사회구성원들 의식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진보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주의 교육을 혁파하는 한편, 사회구성원들이 국가주의 교육에서 갖게 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끊임없이 확인시키고 굳어지게 하는 신문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일은 진보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