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태권도

마지막으로 [b]

주인장군대에 있을 때 에피소드들 중 하나.

아래는 2001년에 나우누리 유머란에 올렸다가 나우TODAY "오늘의 유머"에까지 선정된 -_-v 글인데 새로 적기 귀찮아서 그냥 퍼 옮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군대에 가면 태권도를 익혀서 승단심사를 받아 
모든 사병이 (장교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단자가 되도록 하고 있지요...
그런데 또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규정대로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태권도 수련시간을 갖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드니까.. (다른 작업도 많은데..-_-)
주로 몇 달에 한 번 있는 승단심사일이 다가오면 두 주일 쯤 전부터 부랴부랴
발차기, 품세 등을 벼락치기로 익히곤 한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한 두번 심사보면 단증을 따던데, 유난히 운동신경이 둔하던
저는 (어떻게 신체검사 1등급을 받고 강원도 포병부대로 가게 되었는지 지금껏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_@;;) 병장을 달 때까지도 단증을 따지 못했답니다.

갓 병장을 달았을 때쯤 또 승단심사일이 다가왔고, 단증이 없는 사병들은 매일
몇 시간씩 연병장 한 구석에서 발차기와 품세를 연습했지요. 끝날 무렵이면
허벅지가 땡기고 무릎이 쑤시고.. 온몸이 성한곳이 없더군요.

어느날 연습이 끝나고, 내무반 옆에서 여럿이서 담배를 피면서 쉬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너무너무 연습이 힘들었던 저는 제 자신의 둔한 운동신경과, 
평소에는 연습시간도 안 주다가 이럴 때만 무단자라고 구박하는 장교들에 대한
불만이 섞여서 한참을 궁시렁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말했죠.

"으이구... -_-+ 이젠 태권도의 "태"자만 들어도 지겹다 지겨워!!"

사실 제가 한 말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잖아요? 그래서 다들 별 생각없이
넘어갔는데, 얼핏 보니까 같이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 중에서 갓 들어온 이등병
하나가 빳빳한 차렷자세와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던 겁니다.. 뭐 신병이 다
그런 모습이긴 하지만... 

순간 장난기가 떠오른 저는, 속으로 "얘야 미안하다" 한마디를 읊조리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 "야, 막내야~~"
신병: "예! 이병! 홍!길!똥!"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저희 분대도
아니었는지라..)
저: "(하늘의 태양을 가리키면서) 저게 뭔지 내가 생각이 나지 않네. 저걸 뭐라고
부르냐?"
신병: "0.0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 (상황을 깨닫고) -_-;;;; (진땀을...)"

좀 전에 "태권도의 '태'자도 듣기 싫다"고 제가 궁시렁대었던 것을 뻔히
들었던 지라, 도저히 "태양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그 가엾은 우리의
막내는... 계속 제 눈치와 주위 다른 고참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렇지만
주위의 인간들은 다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우리 둘을 바라볼 뿐이었고,
저는 슬슬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지요.

"야, 저게 뭐냐고~~ 고참이 묻는데 대답 안 하냐? -_-+"
(사실 이럴 때 신병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지경이지요.. 참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결국 머뭇머뭇 거리던 그 신병, 간신히 입을 엽니다.

"저... 저.... 햅니다 (해입니다) !!!!!"


오옷! 이런 예상못한 결과가... 그순간까지도 하늘에 떠 있는 저 밝은 물체를
"해"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우리 고참들은 다들 놀라워했습니다. -_-a

'오.. 이녀석 재치가 있는데?' 속으로 생각한 저는, 한번만 더 놀려보자고
생각했지요. 이대로 물러서면 재미없잖습니까?? ^^

저: "음... 좋은 대답이다. 그러면 두 글자로는 뭐라고 하는데?"
신병: "(또다시) -_-;;;;;;;"

이번에는 이겼다고 생각한 저는, 조금만 더 놀리다가 그만두려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카운터펀치 (제가 생각하기로는) 를 날렸습니다.

저: "자식아 고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할 거 아냐~ 두 글자로는 뭐냐고 임마!"

보노보노처럼 땀을 뽀로로 흘리던 그 신병..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머뭇머뭇 거리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신병: "(더듬거리며)  해... 햇/님/입/니/다!!!"
저와 같이 있던 인간들: "............ -_-;;;;; ......"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나 봤을 법한,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내뱉어보지
않았을 "햇님"이라는 말을 생각해내느라 고생했던 그 막내에게,
태권도 연습에 지쳤던 고참들을 즐겁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괜한 심술로 짓궂은 장난을 쳐서 맘고생시켰던 것에 대한 사과를,
5년이 지난 지금 이 자리에서 고개 숙여 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시간에도 별을 보면서 내일 어버이날에 집에 전화한통 할 수
있을까 하는 소박한 바램을 벗삼아서 야간 근무를 서고 있을 수많은 장병들에게
또한 감사와 경의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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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4-2-10 10:22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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