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사순절을다시생각하며

마지막으로 [b]

사순절을 다시 생각하며 - 전국의 백만 중장년학도여 총 궐기하자!

출처 : 졸톨릭 홈페이지에 이상윤 싸이몬 선배님의 글

만약 예수님이 있던 시대에 신문이 있었다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판소식을 보며 그랬을 것이다. '또 종교얘기군. 지긋지긋해. 다 그놈들이 그놈들이지. 나는 먹고 살기도 힘들어.'

또 어떤 독실한 유대교 신자는 그랬을 지도 모른다. '신문에 이런것 밖에 실을 게 없나? 좀더 유쾌하고 따뜻한 얘기도 많은데 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신앙 생활이나 해야겠다. 그나 저나 구세주는 언제 오시나?'

또 어떤 사람은, '거 너무하는군. 그정도 일로 무슨 사형까지시키나. 근데 예수라는 사람도 너무 뻣뻣한거 아니야? 젊은 사람이 너무 설치더라니... 그러게 말조심좀 할 것이지...'

또 다른 독실한 유대교인은, '목수 아들 주제에 지가 무슨 구세주야. 나는 처음부터 그 녀석이 마음에 안들었어. 거기다가 사람들까지 선동하고 말이야. 아주 불온한 녀석이야. 더구나 나사렛 출신아냐.' 아마도 이 사람은 당시 사회체제에 만족하여 변화를 바라지 않거나 아니면 그런 계층의 정서에 감염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처럼 이 사회의 구세주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실 좀 똑똑하고 고집센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대통령까지 된 것은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지역감정에 편승하지 않고 소신을 지킨, 어찌보면 사소하고 당연한 것뿐이었지만 이 시대는 그 '사소한' 미덕조차도 희귀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출신성분을 가지고 난 것도 아니고, 기득권층의 지지를 가지고 있었던것도 아니고,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흠없고 완전한 인격과 자기관리능력을 갖춘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시대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를 지지한 사람들이 몸 바쳐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것은 그를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구세주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이사회에 얽혀 있는 모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그래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많고, 지지를 후회하는 사람조차도 생겼다.) 해방된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사사건건 우리의 현재를 발목잡는 친일잔재의 활보, 독재정권과 기득권층의 사상적 지지기반이 되어온 반북 숭미 이데올로기, 책임없는 무한권력을 휘두르며 사회를 주물러온 언론권력의 횡포, 이 모든 부정한 것들을 재생산시키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밀월. 이 모든 것들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해온 사람들이 노무현이라는 꼴통을 발견하고 그를 픽업하여 이렇게 까지 만든 것이다.

노무현이 국민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손톱발톱을 세우고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 이틀이 멀다하고 빌미를 주고 있으니 나조차도 어떤때는 짜증이 난다. 하지만 똑바로 봐야하는 것은 하이에나들이 노리는 것은 노무현의 몸통이 아니라 노무현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을 물어뜯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물어뜯는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을 끌어내고 다시 반동의 시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을 하는 동안에도 지지부진했던 여러 개혁적 법안과 조치들이 이제 그 수구반동들이 행정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얼마나 더 날개달린듯 뒤로 달음질 쳐 갈까? 생각만해도 치가떨리고 눈앞이 암담해지는 상황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것은 87년 온국민이 전두환철권통치에 맞선 직선쟁취 민주화투쟁의 성과이다. 더 멀리 올라가면 박정희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버텨왔던 피눈물나는 역사의 옥동자인 것이다. 노무현정부는 아직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기존 기득권층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은 멀리 나가지 못했지만. 아마도 새로운 합리적 질서가 자리잡히는 것은 노무현정부의 몫은 아닐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집트를 떠났지만 아직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인간 노무현을 믿고 따라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집트에 있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사막한가운데에서 춥고 배고프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는 것이 지겨울 때는 홍해바다가 갈라졌을 때의 감격도 되살려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 못하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때는 내 자식이, 아니면 그 자식의 자식이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희망을 가져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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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4-3-13 9:42 a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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