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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컴백, 폭격의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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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 면에서 일제를 훨씬 능가한 1920년대 영국의 이라크 강압통치를 아십니까

제1세계 시민들이 크리스마스와 신정으로 휴식과 쇼핑의 행복한 연말연초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때, 미국·영국의 이라크 침공준비는 날마다 박차를 가하고 있다. 걸프 지역에서 수십만명의 침략군이 이미 주둔하게 되었고 ‘전쟁특수’로 군산복합체가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다.

터키 치하에서 폭정에 시달렸다고?


사진/ 1918년의 윈스턴 처칠. “쿠르드족과 같은 야만인들을 폭격할 때 반드시 화학 가스를 사용해 그들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군사적인 준비와 동시에 선전 차원의 치밀한 공작이 빠지지 않는다. 영국 정부가 ‘시의 적절하게’ 발표한 이라크 인권보고서의 화학무기에 의한 쿠르드족 학살과 고문실 이야기가 보수신문의 일상적인 기삿거리가 되었지만, 화학무기의 재료를 제공해주고 고문과 학살을 은폐해준 것이 1980년대에 후세인 정권의 ‘후견자’ 노릇을 맡은 미국과 주요 서방국가였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침략을 두고, 서방의 주요 방송·언론사들은 대부분 ‘침략·침공’은 물론 ‘이라크와의 전쟁’이라는 표현마저 쓰지 않으려고 한다. 수십만명의 이라크 주민을 희생시킬 대형 국가범죄는 대개 ‘사담 후세인의 무장해제’ 내지 ‘사담 정권의 교체’를 위한 작전으로 불리기 일쑤다. 그럼으로써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첫째, 시민들의 세금으로 만든 침략군의 무기가 사담 후세인과 전혀 무관한- 상당수는 후세인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이라크 주민을 학살할 사실에 대한 납세자 본인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이고, 둘째, 미국보다 몇배로 긴 역사를 가진 이라크를 후세인의 무자비한 독재와 동일시하게 만듦으로써 ‘야만적이며 후진적인’ 이라크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것이다. “고문실과 화학무기의 나라라면, 당연히 우리와 같은 선진국들이 침공을 통해서라도 정상적인 생활로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서방 우파언론의 ‘언어전쟁’ 전략인 듯하다.

그러나 이라크는 그들이 문명화시키지 않으면 안 될 ‘구제불능의 후진국’인가 이른바 ‘후세인 제거작전’이 정말 그들의 말대로 이라크를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라크 근·현대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대답은 오히려 정반대다. 영국의 식민주의야말로 주체적인 근대화의 길로 가던 이라크 사회를 후진화시킨 주범이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식민주의·신식민주의가 이라크에 남긴 유산은 독재와 무자비한 학살, 공포정치의 비뚤어진 전통이다.

유럽인들은 영국에 의한 이라크 지역의 점령(1917) 이전에 이 지역을 통치한 터키 오토만(Ottoman) 제국을 폭정과 압정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이 같은 부정적 의식은, 이슬람 문화권을 타자화하는 유럽인들의 보편적인 고정관념(오리엔탈리즘)과, 17세기만 해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하는 등 비서구권 국가로서 거의 유일하게 서구를 위협할 수 있는 터키제국의 과거 승리에 대한 하나의 복수욕을 반영한다. 그러나 터키 치하의 이라크는 과연 폭정에 시달리는 나라였는가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반대 결론이 나온다.

가혹한 세금 징수와 지주 본위의 토지정책, 토착산업 말살 등의 악정으로 19세기 식민지 인도에서 몇 차례에 걸쳐 대량 기아사태를 낳고 수천만명의 인도인을 굶어죽인 영국이야말로 진정한 폭정을 자행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터키 치하 이라크는 여러 면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원주민들을 인종주의적으로 차별한 영국 통치자와 달리, 아랍인 상인·성직자 대표들과 끊임없이 상의해 정책을 조절하는 이라크에서의 터키 지방관들은 민주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대한제국 시기의 광무개혁과 견줄 만한 1860~70년대 터키제국 정권의 자강(自强)·근대화 정책에 따라 현대적 병원·은행·수도(水道)·학교·전신(電信)을 갖게 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는, 유럽의 도시와 나란히 어깨를 견줄 만한 문화·상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현재 이스라엘의 프로파간다는 아랍인들을 ‘태생적 반유대주의자’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추호의 박해도 받은 일이 없었던 19세기 말 이라크 유대인 상인들이 이 지역 경제 엘리트의 유기적 일부분이었다.

그들이 바란 건 역시 유전이었다


사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또 희생될 것인가. 미국의 침략을 눈앞에 둔 바그다드 시민들. (SYGMA)


영국이 노예화한 인도보다 합리적인 통치체제와 역동적인 경제·문화를 가진 이라크에 대해 영국이 관심을 가진 것은, 물론 영국의 관변선전처럼 “아랍인들을 터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1901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유전(油田) 등의 자원을 약탈하려는 것은, 100년 전의 영국- 오늘의 미국·영국과 마찬가지로- 의 유일한 의도였다.

1917년에 ‘해방군’을 자칭한 영국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적대국인 터키를 패배시켜 이라크에 진입했을 때, 이라크 지도자들에게 독립과 민족국가 수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1919년의 파리강화조약에서 제국주의 열강 간에 ‘세계의 새로운 나눠먹기’를 하고, 이라크 지역이- 물론 그 주민의 의향과 무관하게- 전승국 영국의 ‘위탁통치’ 아래 들어가게 됐다. 말은 ‘위탁통치’였지만, 실제로는 인도의 식민지 관료들이 이라크에 옮겨와 같은 수준의 폭정을 펴게 된 것이었다. 나라가 점차 황폐화되자 모든 종파의 성직자와 옛 관료·상인·서민들이 하나가 돼 1920년의 아랍민족 무장운동을 일으켰다.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무장투쟁을 계획한 점이 다르지만, 사상 최초의 거족적 민족운동이라는 차원에서는 그 전해 식민지 조선의 3·1운동과 격이 비슷한 의거였다.

그러나 1920년의 혁명에 대한 영국의 대응도 일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 학생들이 학교의 국사시간에 배우는 3·1운동 진압 때 일제의 야만성과 가혹성을, 영국인들이 능가할 정도였다. 몇 개월 사이에 1만명 이상의 아랍인들을 학살한 그들은, ‘폭도의 투지를 꺾기 위해’ 그들의 식민지 통치사상 최초로 대량 폭격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그 뒤에 ‘문화통치’로 전환했듯, 영국도 1921년부터 이라크에서 ‘괴뢰 국왕’을 둬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실제 영토 지배를 하고 있는 이라크 주둔 영국군은 그때부터 대량 폭격을 일상적인 ‘치안유지 방법’으로 삼았다. 유례가 없는 ‘폭격에 의한 통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영국 통제 아래 1920년대 이라크에서, 폭격은 그야말로 가장 일상적 통치법이었다. 지금 미국이 ‘후세인 정권의 폭압’으로부터 ‘구출’하고자 한다고 선전하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은, 영국 공군 폭격의 가장 대표적 목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쿠르드족 지역의 유전을 이미 확보한 영국이, 쿠르드족의 자치·독립 요구를 듣고 싶지 않았고, 독립의 의지를 무조건 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1차 대전 때 대터키 전쟁에서 쿠르드족의 지원을 얻기 위해 영국군이 그들에게 독립에 대한 ‘신사약속’을 했다는 것을, ‘신사의 나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920년대에 “쿠르드족과 같은 야만인들을 폭격할 때 반드시 화학 가스를 사용해 그들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사람은 그 당시 영국의 식민성 장관(Colonial Secretary)인 윈스턴 처칠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받드는 ‘전쟁의 영웅’ 처칠이야말로 현재 미국·영국 신문들이 ‘새로운 히틀러’라고 매도하는 후세인의 스승인 셈이었다.

“까불면 무조건 터뜨린다”

그러나 영국 공군의 폭격 표적은 민족국가 성립을 열망한 쿠르드족만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이라크 중부의 아랍인도 영국 폭탄의 위력을 자주 경험해야 했다. ‘폭격에 의한 통치’를 지향한 영국인들은, 행정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마을이나 세금을 체납한 마을, 소란(민족운동)을 피울 것으로 예상되는 마을까지 폭격 목표물로 삼았다.

당시 이라크 주둔 영국 공군의 장군인 살몬드가 상부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그러한 폭격의 가장 중요한 뜻은 원주민들의 경제생활을 파괴하고 그들을 일상적 공포에 빠뜨림으로써 ‘순치’의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언제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올지 몰라 늘 두렵게 위를 우러러보고 미폭발 폭탄 때문에 밭에 나가지도 못하는 원주민들의 기가 꺾인다는 것은 살몬드가 자랑으로 삼은 보고내용이었다. 폭발되지 않은 폭탄들을 재미있는 장난감으로 삼아 놀다가 살점이 사방으로 날아가 시신도 해골도 안 남는 비극의 죽임을 당하는 이라크 아이들이 ‘폭격통치’의 주요 희생자였다는 사실이 보고서에서 빠진 것은 물론이다.

1958년에 ‘괴뢰 왕권’을 타도해 공화국이 된 이라크를, 미국·영국이 이번 침략을 통해 재식민화하려는 셈이다. 한국의 일제 시절과 비교될 만한- 아니, 잔혹성으로 일제를 능가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 1920년대의 ‘폭격통치’가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인가 식민주의로 인해 주체적 발전의 기회를 빼앗겨 황폐화된 이라크 시민들이, 재식민화를 막기 위해 침략자와 사투를 벌일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라크 역사가 다시 한번 후퇴하지 않기 위해서, 이라크의 민중이 다시 한번 식민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전 세계 양심 있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연대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라크 침략을 막아야 한다.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자료 링크

▶▶이라크 역사 종합사이트 http://home.achilles.net/~sal/iraq_history.html

▶▶이라크 망명자들에 의해서 만든 이라크 문화·역사 정보사이트 http://www.angelfire.com/nt/Gilgamesh/history.htm

▶▶이라크 역사 연표 http://i-cias.com/e.o/iraq_5.html

▶▶20세기 이라크 국가 원수들의 간략한 전기 http://home.achilles.net/~sal/Iq_rulers.htm

▶▶ 이라크의 여행·지리 정보http://www.arab.net/iraq/

▶▶이라크에 대한 경제 제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연대http://leb.net/I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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