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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제도를 꿈꾸며

원문보기: [한겨레신문]

내가 어렸을 때 동네골목은 아이들로 시끌벅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내팽개치고 몰려나온 우리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어머니들이 “저녁밥 먹어라”고 불러야 집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놀이를 즐겼다. 심하게 몸을 놀려야 하는 놀이가 아니면 나이가 어리거나 몸이 약한 아이들도 빼지 않았다. 편을 갈라 벌이는 놀이에서는 어느 편에도 포함되지 않은 채 공격 쪽에만 끼게 한다. 개인전 형식의 놀이에서는 술래가 되지 않는다. 약자가 놀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이 제도는 해당되는 아이가 있을 때면 언제든지 시행됐다. 우리는 그런 아이를 ‘깍두기’라고 불렀다.

어른들 세상에는 아예 이 제도가 없다. 나이 어리거나 몸이 약한 아이를 귀찮게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등록된 장애인만 120만명이다. 기업에 고용 장려금을 지급해도 장애인 채용을 꺼리고, 대학에서 장애인 입학을 거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체장애 시각장애 가릴 것 없이 장애인들은 이동하기가 어렵다. 이동을 해야 비정규 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고 취업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집 밖에 나서면서부터 꼼짝도 못하고 만다. 대중교통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목숨을 건 시위를 벌여도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한해 40만명 정도가 교통사고로 다친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도 장애인들을 배려하기는커녕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취급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이 어리거나 몸이 약한 아이가 정당한 얘기를 해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아이라고 고자질해 혼을 내준다. 노동자들의 힘은 파업에 있다. 그러나 헌법이 보장하는 단체행동권은 지나치게 엄격한 노동조합법 규정 탓에 웬만하면 불법파업이 된다. 기업들은 불법파업을 유도하고 파업을 벌인 노조 집행부는 물론, 참가 조합원들까지 검찰에 고발해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되도록 한다. 다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고 가압류를 신청해 노동자들의 임금뿐 아니라 입사할 때 보증을 선 친지들의 재산까지 묶어 버린다. 법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얽어매는 신종 노동탄압 수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노동자들을 형사처벌하는 검찰이나, 가압류 결정을 하는 법원 모두 기업 편이다.

그뿐이 아니다. 나이 어리거나 몸이 약한 아이를 때리고 위협해 돈을 뜯는 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산업연수생 제도가 그것이다.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에서 인력을 도입하면서 기술연수를 시켜준다고 데려온다. 연수는 없이 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는 업종에서 값싼 임금으로 일을 시킨다. 노동자를 구하지 못한 영세업체로 옮기면 조금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지정 사업장을 이탈하는 것과 함께 불법 체류자가 된다. 불법 체류자라는 약점 때문에 임금을 떼어먹히고 산업재해를 당해도 호소할 데가 없다. 노동력이 필요하면 고용허가제를 통해 정당하게 외국인력을 도입하고 제대로 노동자 대우를 하면서 일을 시키는 것이 도리다.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연수생 제도가 임금 부담을 줄이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두루 알고 있지만 연수생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떡고물을 챙기는 이익단체의 반발을 구실로 모른 척한다. 가난한 이웃나라 사람들의 노동력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아이들 세상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짓들이다.

때로 성질 나쁜 골목대장이 놀이에 방해가 된다고 나이 어리거나 몸이 약한 아이들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대개는 ‘깍두기’로 붙여주자는 다른 아이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 사회적 약자들이 보호받는 구조를 아이들 세상에서는 진작 구현하고 있었다. 세계인권선언은 ‘누구든지 건강과 복리를 위한 충분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고, 생활능력을 잃었을 때는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한다. 깍두기 제도는 국가나 사회의 시혜가 아니라 누구나 갖는 권리임을 밝히고 있다. 문제는 성질 나쁜 골목대장들을 사회가 견제하지 않는 데 있다. 검찰, 법원, 정부, 국회가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깍두기 제도를 꿈꾸는 것은 결코 엉뚱한 일이 아니다.

고희범 논설위원nat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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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3-28 4:45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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