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화면으로]교육인가야만인가

마지막으로 [b]

교육인가, 야만인가 / 홍세화

원문: [인터넷한겨레]

최근에 우리 교육의 실상을 알게 해주는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서울대에서 ‘고교평준화가 국제인권규약에 위반된다’는 연구서가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산시교육청이 경찰력 투입을 요청하여 농성중이던 전교조 조합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케 한 사건이다. 두 사건은 그릇된 권위와 공권력으로 이미 처절하게 왜곡된 교육을 더욱 파행으로 몰아가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서울대 연구서는 ‘고교평준화가 종교의 자유, 종교 교육의 자유, 그리고 사립학교 선택과 운영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자유를 주장할 만큼 한국사회의 인권수준이 대단히 높은가 보다. 또 국민의 3분의 2가 가톨릭임에도 ‘교육-종교의 분리’라는 공화주의 원칙에 따라 90% 이상의 고교생을 수용하는 공립학교에서 종교교육을 배제하고, 고교뿐만 아니라 대학도 평준화되어 있으며 모두 국립인 프랑스는 인권 미개국임에 틀림없다. 진정으로 국민의 사회적 기본권에 관심이 있는가 그러면 가난한 사회구성원들에게서 교육받을 권리를 빼앗고 있는 사회현실에 먼저 눈을 돌려라. 무료 공교육제도를 강화하면 신자유주의의 적자인 한국의 교육인적자원부가 바라는 ‘인적자원’을 늘려 국가경쟁력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할 자유조차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자들, 즉 가진 자들의 국내경쟁력을 더욱 강화하여 계급·계층의 단순재생산구조를 더욱 굳히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엔도 국제인권규약에 의거해 ‘한국의 열악한 공교육에 따른 사교육의 가중과, 사립학교가 지배하는 고등교육으로 저소득층에게 불리’하고, ‘경제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한 무료 의무교육 제공단계’를 지적한 바 있다. 부디 특목고, 자립형사립고, 비평준화지역 등으로 이미 흔들리고 있는 고교평준화 제도를 더이상 흔들지 말고 무료 공교육제도의 강화를 주장하라.

또 진정으로 학생들의 인권에 관심이 있는가 그러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하루 14시간, 16시간, 18시간씩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일상을 살펴보라. 소년노동을 강요하는 동남아시아를 야만이라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그 사회와,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일찍부터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각축장’으로 내몰아 문제풀이 요령습득경쟁을 통해 ‘줄세우기’를 강요하고 학벌주의 사회를 공고히 하려고 노동시키는 사회 중에 어느 사회가 더 야만적인가

사교육비가 투자처럼 인식되는 사회에서 경쟁에서 이긴 자는 이긴 자로서 보상을 당연하게 요구하게 된다. 사회 상층에게서 사회적 책임의식이나 사회환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에 고마움을 표명하는 구성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 교육제도와 현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지독한 경쟁을 부추긴 데서 온 결과다.

한편, 전교조 부산지부는 최근에 인문계고교의 0교시수업, 보충수업, 야간강제자율학습, 불법찬조금 모금 등에 대한 국민감사를 신청했다. 감사원이 이를 받아들여 부산시교육청에 대한 감사를 결정했는데 그 뒤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부산시교육청이 잘못을 시정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학교장들을 통해 학부모를 동원하는 등 감사를 저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마다지 않은 것이다. 2001년 단체교섭을 2002년이 저물어가는 이 시간까지 무성의로 일관하여 게을리한 부산시교육청은 급기야 전교조 조합원들을 연행하도록 했고 간부가 구속되는 사태를 발생하게 했다. 부산시교육청은 이 나라 교육현실을 자랑스럽게 반영하고 있다. ‘야만’이라는 이름의 그것을.

홍세화/ 기획위원

교육인가, 야만인가 2 / 홍세화

원문: [인터넷한겨레]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한 재수생은 수능 점수 몇 점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라는 말을 들을까 두렵다”면서 죽음을 택했고, 매일 14시간씩 학습노동에 시달리던 한 초등학교 5년생은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의 길을 택했다. 또 다른 초등학생은 급우들에게 당한 왕따의 고통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고발했다. 어린 아이들이 토해내는 고통과 절망의 소리들, 그러나 이 사회는 이미 면역이 되어서인지, ‘내 자식만 아니면 그만’인 죽음들이기 때문인지 눈 한 번 꿈적거리곤 그만이다. 남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 비정하기 짝이 없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어버린 줄조차 모르는 지독한 불감증에 걸린 사회, 야만은 스스로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상적 고통과 절망은 내일도 또 그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복권이나 도박에 빠진 사람들은 좀처럼 그 놀음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절대 다수가 결국 잃고 만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놀음의 중독증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극소수의 횡재한 사람들을 선망하면서 그 안에 자신이 포함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 학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이와 비슷한 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경쟁을 통한 계층상승 게임에서 절대 다수는 결국 뒤떨어지거나 패배하고 말지만 혹시나 자기 자식은 극소수의 승리자가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명문’ 대학생들의 집안 분석에서 드러났듯이 교육과정은 사회계층을 순환, 이동시키지 않고 단순재생산한다. 소수의 승리자는 이미 정해진 집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겐 교육이라는 이름의 경쟁게임보다 무작위로 추첨되는 복권이나 도박이 더 기회균등적이다.

이 땅의 교육현장은 실상 미래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불안심리를 이용한 장사판이다. 이 점은 사교육 현장에서 두드러지지만 학교도 언론도 정부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모두 교육 파행과 왜곡을 낳는 학벌사회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해법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학벌사회를 부추기는 편에 속해 있다. 학교는 학부모들의 막무가내 자식이기주의에 올라타 아이들을 밤늦게까지 교실에 가두면서 직간접수당을 챙기고 있고, 언론은 도박심리와 불안심리를 부추기면서 장사를 도모하고, 교육관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뒷전에서 철밥그릇에 만족하고 있다.

이 노름판, 장사판에서 죽어나는 것은 아이들이다. 도대체 일어나서부터 잠잘 때까지, 아니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으면서 학습노동을 하루도 빼지 않고 강요하는 것이 억압이 아니고 학대가 아니라면 그 무엇인가. 학대받고 억압당한 아이들은 학대받고 억압당한 그만큼 남을 학대하고 억압한다. 피학은 그 상처의 깊이만큼 가학을 낳는 법이다. 학교에서 왕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다른 학생에 대한 학대와 억압을 통하여 자신이 당하는 학대와 억압을 보상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학생에게 주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하다. 게다가 아이들은 가정을 떠나면서부터 오직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만 경험한다. 그들에게서 남에 대한 배려나 연대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나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학벌사회의 폐해는 부, 명예, 권력을 일부가 독점하는 문제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학교의 좁은 교실과 과외수업밖에 모르게 된 아이들은 대자연의 정서를 상실했다. 어린 시절의 시냇물을 모르고 함께 별을 헤던 동무가 없고 바람소리, 풀벌레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 아이들에게 ‘꿈’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꿈을 상실한 아이들이 과연 아이들인가. 어린 아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야만을 그만두고 아이들에게 꿈을 되돌려주기 위해서 지금 당장 사회전체가 달려들어야 한다.

홍세화/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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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3-28 4:45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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