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한겨레]
노무현 정권의 개혁 전선은 어디에 있나 그것은 법무부장관실에나 있는가 민생 부문에 무엇이 있는지 대답해줄 사람은 누구인가
현상은 항용 본질을 감춘다. 참여 정부가 조중동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서 언뜻 개혁 전선이 조성돼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농민 부문에서 정부와 조중동은 서론에선 간혹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결론에서는 항상 만나고 있다.
가령 조중동이 쌍심지를 켜고 비난하는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보자. 5·15 노정합의 이후 지켜진 것은 고속도로 심야할증 두 시간 연장과 경유보조금 지급뿐이었다.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였는데, 핵심은 구간별 기준운임 인상과 화물운송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그리고 차량 소유권 보장문제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운송회사측은 불성실 교섭으로 일관해 왔고, 정부는 화물운송 노동자들을 “산재보험을 요구할 때는 자영업자로 분류하고 노동쟁의를 탄압할 때는 노동자로 분류하는” 편의적 발상을 바꾸지 않았다. 세 차례 시한을 연장한 뒤 막판에 몰린 화물연대의 파업에 대해 정부는 국가경쟁력과 국가신인도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조중동을 좇아 ‘불법집단행동’ ‘엄정대처’를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에서도 노정권과 조중동은 대기업노조의 집단이기주의와 노동귀족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냈던 점에서 서로 만난 바 있다.
집권 초 ‘재벌 개혁’이란 당면 과제와 함께 자랑스럽게 내놓았던 ‘분배와 성장의 균형’이란 화두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신용불량자가 삼백만을 넘고 절망의 자살사건이 빈번히 일어나건만 분배와 성장의 균형은 재벌 개혁과 함께 구호마저 사라진 반면, 그 자리에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대신 들어앉았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시대처럼 성장주의로 선회한 참여 정부의 이런 변화에 조중동에 빚진 게 많다고 하면 틀린 말이 될까. 이처럼 노정권과 조중동은 현상적으로는 서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면서 싸우지만 본질에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여론형성자와 정책결정자로 서로 인정해주는 관계인 것이다. 조중동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48.9%의 지지를 놓치고 있는 것도 직무유기라고 말할 사람은 없는가. 극우임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사의 “대통령 잘못 뽑았다”라는 폭언이 6개월 전의 초심을 돌이켜보게 할 법도 하건만. 그리고 앵톨레랑스 세력은 철저히 무시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대응임을 왜 모르는가. 서로 싸우며 서로 키워주는 게 앵톨레랑스 세력의 속성이거늘.
집권 여당은 반년 동안 통합신당-합당-도로민주당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겉으로는 야당과 노상 싸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극우를 극복하기 위한 싸움도 아니었고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그 싸움의 이유란 게 고작 ‘노무현 대통령과 개구리의 다섯가지 닮은 점’에서 보듯이 유치하기 그지없거나, 무능-무지-무대책으로 아이엠에프 환란을 불러왔던 와이에스의 ‘무지-무능-무대책’론처럼 황당한 것들인데, 정작 기막힌 일은 주5일근무제를 도입한다고 정부가 내놓은 근로기준법안을 개악하는 데에선 둘 사이의 짝짜꿍이 아주 잘 맞는다는 점이다. 금속노조 사업장들과 현대자동차 노사의 ‘노동조건 후퇴없는 주5일제 근무 도입’ 합의가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재계의 요구를 따르는 데에서 여야당은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경제자유구역법을 통과시킬 때 그랬듯이, 정치자금에 대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이처럼 함께 눈감았듯이 그들은 그야말로 한통속이었다.
이처럼 수구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 데 반해 개혁의 전선은 있어야 할 곳에 없고 빈그릇처럼 요란하기만 할 뿐이다. 그들만의 잔치인 정치쇼나 기싸움을 그만두고 개혁의 진정한 전선을 구축하는 것은 진정 불가능한 일인가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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