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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애도한다/ 송경아

원문보기 - [한겨레]

대학교 저학년 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전공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적을 둔 이과대 토양 자체가 인문 사회과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고, 또 그때 나날이 시위는 어찌 그리 많았던지. 지금 같으면 시민단체와 노조가 하고 있을 시위까지 학생 운동권에서 했기 때문에, 최루탄 연기 맡으며 뛰어다니다 술 한잔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픽 쓰러져 자기 바빴다.

그런 큰딸이 한심해 보였던지, 어느 날 아버지가 책 한 권을 건네주셨다. “매일 뛰어다니지만 말고 차분하게 앉아서 읽으면서 생각 좀 해 봐라”라는 말씀과 함께. 그 책은 낡고 누렇게 바랜, 삐뚤빼뚤한 납 활자체의 〈헌법개론〉이었다. 마지못해 시큰둥하게 받으면서 ‘법 같은 보수 이데올로기, 실제로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에 무슨 소용이 있어’ 하는 딸내미의 속을 꿰뚫어보셨던지, “사람들이 흔히 착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만, 법이 없으면 그런 사람들이 제일 먼저 희생당하는 거야. 법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몫을 찾아주는 심판이고, 헌법은 그런 법의 정신이다. 우리나라가 어떤 정신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지 좀 읽어 봐” 하고도 말씀하셨다. 하지만 극단적인 정국과 어린 마음에 그런 말씀이 먹혀들 리가 만무했다. 결국 〈헌법개론〉은 책꽂이에 꽂힌 채 버림받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헌법은 나한테서만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보다 하는 슬픔을 느낀다. 누가 봐도 침략이 분명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파병하기로 한 결정으로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규정한 헌법 제5조 제1항과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라고 명시한 제5조 제2항을 무참히 우롱한 것은 누구인가. 누구보다 법을 잘 알고 있을 변호사 출신의 대통령과,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었다. 이라크 파병 동의안이 가결된 4월2일 국회에서, 헌법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껍데기 법이었다.

국회의원들이 헌법을 우롱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국정원장과 국정원 기조실장 내정자의 검증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후보자들이 “사상적, 이념적 편향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몇몇 의원은 ‘정보 분야의 비전문성’ 또한 들고 있지만, 이것이 주요 쟁점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안다. 그렇다면, 헌법 제19조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양심의 자유’에는 사상적 자유가 포함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정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온 것이 어떤 인사의 공민권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뼈대가 아닌가.

인사청문회라는 것이 과연 국회의원에게 해당 후보자의 사상을 검증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인가 하는 점도 따지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인사청문회는 후보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거나 이전하여 공적인 직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닌지, 해당 직책을 맡았을 때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할 것인지를 검증하는 것이다. 인사청문회에서 해당 후보자의 사상이나 이념을 가지고 된다 안 된다를 논하는 것 자체가 월권이며, 해당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다.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올해 들어서만 이라크 파병 결정에 이어 두 번째로 헌법 유린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이 법의 정신이라면, 그 헌법을 앞장서서 짓밟은 국회에서는 앞으로 법을 만들고 국민에게 그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다. 국회는 법의 산실이 아니라 헌법을 감싼 수의가 되어버렸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하고 분개하는 국민에게 국회 의사당의 둥근 지붕은 차갑게 답한다. “법은 없어!”

2003년,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앞장서서 죽여버린 헌법을 애도한다.

송경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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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4-25 4:50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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