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한겨레]
이제 곧 대통령을 선출한다. 대통령이란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공화국’ 대통령을 말한다. 따라서 국민이 공화국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면 대통령을 올바르게 선출할 수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공화국을 ‘대물림하는 왕 대신에 국민이 국가수반을 뽑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결국 투표 행위만으로 이 나라가 공화국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인데, 한국사회에 공화국의 진정한 의미가 정립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학’은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공화국’(res publica)이 되었다. 곧 처음부터 공화국은 공(public) 개념에 바탕을 둔 ‘공익’ 사회를 뜻했던 것이다. 병역이 공화국 시민이 되는 일차적 조건이었던 것도 ‘공익’ 개념에 따른 것이었는데, 공화국에 반대되는 전제국은 ‘힘에 의한 권위가 행사되는 국가’를 말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수구기득권세력, 즉 한국사회의 주류는 힘에 의한 권위를 행사하면서 사익을 추구한 전제적 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공익 개념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공익 개념을 근간으로 하여 시작된 공화국은 근대시민혁명을 거치면서 ‘질서에 우선하는 사회정의’를 핵심내용으로 갖게 되었다. 중세의 신분적 질서(order)는 신의 명령이었던 바, 이 봉건적 신분 ‘질서’를 자유와 평등 이념으로 물리치면서 태어난 것이 바로 근대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화국’엔 고대공화국의 공익개념도 비어 있고 근대공화국의 사회정의개념도 비어 있다. 왜 그럴까 때때로 출몰하는 ‘진드기정치인’(철새정치인)들은 스스로 사익추구집단임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질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익추구집단이 자유를 지킨다면서 사회정의의 요구를 억압하는데 성공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과 청년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그들이 갇혀 있는 모습은 질서 이데올로기로 사회정의의 요구를 억압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디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지 무질서가 아니다. 그러나 헌법에 민주공화국이 선언된 1948년이래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 노 독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수구세력은 교육과정과 주류언론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에게 무질서가 자유의 반대인양 끊임없이 세뇌해 왔다. 그들이 주장한 자유는 실상 그들의 사익추구를 극대화하기 위한 질서 이데올로기의 관철을 위한 외피였다. 이 점은 국가보안법을 부여잡고 있는 자일수록 높은 병역 미필율을 자랑하는 모순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알베르 카뮈의 ‘사회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는 말이 공화주의의 선언이 되는 까닭을 알아야 한다.
지난 봄에 실시된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파 국민전선당의 장 마리 르펜이 결선투표에 나서는 이변이 일어나자, 십여만 명의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반대시위를 벌였다. 투표권 없는 그들은 “공화국을 지키자!”고 외쳤다. 장 마리 르펜의 오른팔이며 국민전선당의 제2인자인 브뤼노 골리슈에겐 선망하는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 고등학생들이 지키자고 외친 공화국과 그 공화국의 적이 선망하는 대한민국 ‘공화국’...
21세기 들어 처음 뽑는 대통령. 이번에는 정말 공익과 사회정의의 진정한 공화국의 초석을 다져야 한다. 후보자를 판단할 때, 공익추구세력에 속하는가, 아니면 사익추구집단에 속하는가를 제일차적 판별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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