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톨릭홈페이지에 어느 선배가 올린 글
백여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태어난 바에야, 자기 뜻대로 존재의 가능성을 펼쳐 보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는 것은...
방화를 저지른 사람은 '나 혼자 죽는 것보다 같이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그는 55살이다. 운전을 하다가 퇴직했다고 한다. 청소일을 하는 아내가 그의 생계를 책임졌다.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이다. 러셀은 먹을 것만 충분하고 안정만 보장된다면 동물들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동물들이 그 상태만으로 행복했을까? 더군다나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물론 안전과 재해방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오히려 아무리 우리가 안전하려 해도 소외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하는 한, 결코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여성 장애자였던 최옥란씨가 죽음으로 최저생계비에 항의를 해도, 한 노동자가 자본에 대한 분노로 분신을 해도 결코 미디어는 떠들어 대지 않는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재난에 대해서는 큰 소리로 떠들어 댄다. 안전 장치를 선진국 수준으로 갖추라고.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지금보다 더 철저히 보장하라고.
아마도 우리 모두는 마음 속으로 정신장애자들이 길거리를 나다니지 못하도록 법령이 제정되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역시 나이 들어 힘 없고 가진 것이 없으면 저렇게 인간 말종이 되기 십상이라는 교훈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사기를 치고, 자기 자식은 안전한 선진국으로 공부시키러 보낼 것이다. 아, 그리고 가끔은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내고, 지식인양 행세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견해도 말하고, 내세에 대한 보험으로 다마구찌 같이 돌보는 하느님도 하나 키우고...
"네가 백 마리의 양을 가진 자라고 생각해 보라. 어느 날 밤 네가 양들을 세어 보다가 그 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을 때 너는 어떤 행동을 하겠느냐 ?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그 날 밤을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함께 지내겠느냐?"
예수는 수량에 관한 역설을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혹시 아흔 아홉의 영혼들과 하나의 영혼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백 개의 아니 수 억개의 영혼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하나의 큰 영혼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자유롭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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