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 [한겨레]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사스)으로 온 세계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말레이시아는 홍콩에서 오는 사람의 입국을 거부한다는 ‘대책 아닌 대책’을 내놓았다가 거둬들이는 소동을 벌였으며, 대만과 타이는 외교분쟁으로 이어질 지경이다. 홍콩의 캐세이퍼시픽 항공은 운항 횟수를 4분의 1로 줄였다. 국제회의와 행사는 줄줄이 취소되었다. 치사율이 3%대이면서도 세계를 이 정도의 공포와 충격으로 몰아넣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그 원인과 옮기는 경로가 불분명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음’은 이성에 기초한 근대사회의 구성원리 자체를 뒤흔드는 가장 무서운 공포다. 둘째는 이 병이 다른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여행’이라는 세계화 시대의 ‘일상’을 통해서 세계로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사스에 대한 난리법석은 좀 유난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이 난리법석은 제3세계 의료 활동가들이 던졌던 질문, ‘왜 말라리아가 아니라 에이즈인가’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말라리아는 그 감염자 수가 2억명 이상이고 해마다 200만명이 죽어가는데도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반면, 에이즈에 대해서는 유엔부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말라리아 약의 경우, 잠깐 동안 말라리아 위험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방약은 오래 전에 나와 있는데, 현지인들을 위한 예방약이나 치료약이 없다는 점은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그들은 물었다. 상식적으로 말라리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약이 제일 먼저 개발되어야 하는데 거꾸로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사실상 아주 간단했다. 말라리아로 죽는 것은 제3세계 사람들이지만, 에이즈 초창기에 죽었던 사람들은 백인들이었기 때문이란다. 여기에는 역시 근대사회의 두 구성 요소인 국가와 자본이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첫째로 백인들이 그들의 ‘시민’ 혹은 ‘국민’이기 때문이고, 약을 살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병의 경우에도 국가와 시장 모두 ‘백인이 감염되고 위험해지는 경우’에만 관심이 있다. 신약이든 뭐든 보호 대상자가 돈벌이가 될 만한 값어치가 있을 때가 우선인 것이다. 그래서 ‘관광객’을 위한 약은 있지만 ‘현지인’을 위한 약은 개발되지 않았다.
사스에 대해서도 이런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만약 사스에 백인들이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이 난리가 났을까 그저 홍콩과 중국이라는 ‘지역’ 문제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사실 사스 초창기에는 그런 식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백인들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이것은 ‘세계’ 문제가 되었다. 최근 영국의 사학 명문 이튼 등 일부 기숙학교들은 학기 시작 전 10일 안에 사스 발병지역을 다녀온 학생들에게 등교 금지령을 내리고 벽지의 캠프에 이들을 격리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의 사스 공포에서 인종주의의 유령을 보는 것이 억설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다.
엄기호/팍스로마나 소속 국제연대활동가·필리핀 마닐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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