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 [한겨레]
심하다고요. 뭐가 심합니까.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입니다”
서울방송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의 작가 이환경씨는 “역사왜곡이 심한 게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발끈하며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픽션이) 어느정도 가감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역사적 공간이나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그가 말한 ‘어느정도 가감’이 용인될 수 있을까. 과연 이 드라마를 ‘협객 김두한의 활극’이라고 재미로만 볼 수 있을까.
피비린내 나는 좌우의 극심한 대립과 분단, 처단되지 않는 친일파의 득세 등 서글픈 해방공간의 현대사를 잊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드라마는 대단히 불편하게 다가온다. 우선 해방공간에서 대한민청 별동대의 이름으로 공산당과 좌익를 상대로 ‘백색 테러’를 서슴지 않았던 김두한 일행의 행적에 제작진은 상당한 의미와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까닭이다. 그래서 시대착오적 ‘반공 신파극’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한다. 시청자 황대득씨는 이 드라마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김두한이 공산당을 잡으러 나서는 대목에서 드라마는 좌익들의 행동에 대한 반격으로 그들의 행동을 미화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좌익 노조단체인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이 주도한 대규모 파업에 대한 진압과정과 노조간부 집단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드라마의 묘사를 비교해보면 소름이 끼칠 만큼 간극이 존재한다. 김두한은 1969년 <동아방송> 프로그램 ‘노변야화’에 출연해 파업을 진압한 뒤 전평 간부 8명을 찾아내 즉결처분하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증언했다. 그는 국회의원 출마 포스터에 ‘좌익척결’을 내세울 정도로 언제나 ‘백색 테러활동’에 당당했다고 한홍구 성공회대(한국현대사) 교수는 말했다.
“경찰에 인계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나씩 끌고가서 뒤통수를 쏴서 죽여버렸어요. 그걸 언제 넘겨요 넘기면 콩밥 먹고 징역 살고 나오면 또 골치 아프니까. ”
드라마에서는 이 대목을 두한 친구 ‘김무옥’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두한 일행의 ‘복수’로 묘사한다.
총격전이 오가는 파업진압 과정에서 양쪽의 희생이 커지자 두한과 ‘금강동무’가 1대1로 맞짱을 떠 지는 쪽이 물러난다는 신사협정을 맺었으나 두한이 이겼는데도 ‘전평 지도자 허성탁’이 비겁하게도 공격을 명령해 김무옥이 총을 맞아 숨진 것으로 그려졌다.
드라마에서 ‘좌익의 비겁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거지생활을 같이한 절친한 친구 정진영이 좌익 전위대 대장으로 사사건건 자신과 마찰을 빚자 김두한은 끝까지 고민하다 결국은 죽이는 장면은 그 절정을 보여준다. 두한은 정진영에게 권총을 건네 자살하라고 ‘마지막 우정’을 배풀었으나 정진영이 같이 죽자며 총부리를 두한에게 향하고, 그것이 빈 권총으로 밝혀지고, 두한은 “진영이 네가 자결하려고 했다면 살려주려고 했는데…”라며 그를 죽여버린다. 마치 홍콩 누아르에서 많이 본 듯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사수하는 과정에서 정진영을 포함해 좌익 전위대 다수를 납치해 살해한 혐의로 미군정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 받았던 김두한은 이 부분에 대해 “옷을 홀딱 벗겨 심문한 뒤 껌껌한 밤에 다 죽여버렸다”고 증언했다.
아픈 현대사를 이렇듯 선악의 대결구도로 몰아감으로써 ‘반공드라마’로서 교육효과는 청소년에게 즉각 나타나고 있다. 드라마 홈페이지에는 우려의 목소리도 상당하나 “김두한이 암만 사람 많이 죽였어도 김두한 때문에 오늘날이 있는 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당시에 빨갱이들 안 때려잡고 가만 놔뒀으면 지금 니들이 배 따시게 먹고 앉을 수 있나”는 옹호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물론 작가는 최동렬 기자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개인의 원한을 나랏일에 결부시킨다면 그건 참으로 위험한 생각일세. 적어도 길이 보이지 않은 때는 그 길을 찾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일세”이라며 나름대로 ‘역사적 균형’을 취하려고 하지만 전체 드라마 내용과 겉돈다.
정치드라마를 만든 적이 있는 한 프로듀서는 “정치·역사 드라마에서 어느 정도 허구가 가감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정치물에서 정치적 상상력이 동원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당시 역사적 환경과 배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그럴 수 있다’는 합리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결여되면 공상이고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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