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핸드폰은 공중전화
[원문-프레시안]
만약, 한가한 토요일 오후에 목욕을 하고 있는데
친구가 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불러내었다 하자.
욕조에 있는 당신은 무슨 일인가 놀라서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나왔다.
욕탕에 앉아 있는 사람을 불러 낼 만큼 중요한 일이란,
아버지가 돌아 가셨거나 아들놈 여자친구가
아이를 가졌다며 찾아오는 일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점심에 뭐 먹으러 갔다 왔다고 묻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뭐뭐 먹고 왔다고 하니
누구랑 갔다 왔다고 묻는다.
이런 실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마루 바닥에 물은 계속 떨어진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지금 손님과 중요한 상담 중이다.
그 손님 뒤로 여러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불청객이 나타나서
당장 이야기 좀 하자고 조른다.
모든 일을 다 제쳐 놓고 자기와 지금
당장 이야기를 하자고 막무가내로 조른다.
당신은 할 수 없이 손님을 앞에 두고 그 사람과 마주 앉는다.
손님의 얼굴에 짜증이 번져간다.
온 가족의 저녁 식사중이다.
김치찌개는 보글거리고 고등어는 막 구워져 나왔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더니 잠깐 보자는 것이다.
식사중이라는 말도 못하고 끌려 나갔다 와 보니
찌게는 식었고 아이들은 벌써 먹고 달아났고 밥맛은 사라졌다.
전화의 횡포는 매사 이런 식이다.
전화의 편리함을 무시하지 못하지만
전화의 무례함도 도를 넘어선 느낌이다.
내게 전화를 해서 거기 어디냐고 묻는 사람…….
( 누구에게 전화 하는지도 모르고 전화 하는 것인가? )
“잘못 거셨군요” 라고 말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냥 끊어 버리는 사람…….
( 죄송합니다. 한마디 하면 안 되나? 익명성 속으로 숨어버리는 인간성)
내 말을 가로막고 끝없이 상품을 선전해 대는 사람…….
(멱살을 잡히고 있는 느낌,
내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 만 하는 사람과의 통화는 대화가 아니다.
무식한 놈은 무식한 방법이 최고, 말없이 뚝 끊어버린다.)
그래도 또 다시 전화해서 기어이 안마기를 팔려는 사람…….
( 잠시만 기다리라 해놓고 30분정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다시 전화가 오지 않는다)
10분간이나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해대더니 그대로 전해 달라는 사람…….
(옆으로 전달! 또 옆으로 전달? 이거 TV청백전에서 많이 봐서 안다.
괜히 엉뚱한 소리를 전한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면
다시 전화 해달라고 말해야 된다 )
“난데……. 사장 바꿔” 예의도 경우도 없는 사람…….
(내가 사장이다. 넌 누구냐?)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기부하라고 전화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업 현황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람…….
( 진짜 그런 거라면 나에게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런 건 한 5분쯤 지나면 돈 얘기가 나온다. 누구네 교회 목사 수법이다)
긴급히 연락해 달라는 메모가 책상 위에 있다
( 긴급히 전화를 돌린다. 저희 회사의 고객이면 1번을 누르시고
비고객은 2번을 누르십시오. 2번 누른다. 담당자의 연결 번호를 아시면
1번, 모르시면 2번, 해당 없으면 3번을 누르십시오. 3번 누른다.
저희 회사의 고객이시면 1번을 누르시고 비 고객은 2번을 누르십시오.
또 당했다.)
오지랖이 넓어 세상 사람이 다 자기를 알고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
직원: 어떤 여자 분한테 전화 해달라는데요.
나: 어떤 여자라니? 전화번호나 이름도 없어?
직원: 네! 그렇게 말하면 알거라는데요.
(아내에게 오해 받기 딱 좋은 케이스이다. )
친구들은 내게,
그러려면 전화는 뭐 하러 갔고 다니다며 나무란다.
내 핸드폰 번호로 전화하면
도대체 통화 되는 일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난 내 핸드폰은 공중전화라고 말한다.
내가 꼭 필요할 때나 가끔 사용하지,
오는 전화를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현대 생활에 전혀 적응이 안 되는
괴팍한 버릇이라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현재, 꼭 받아야 되는 전화를
받아 본 적이 몇 번 없다.
그런 일이란 아들놈이 놀다가 학교 버스를 놓쳐
학교에서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나,
아내가 기름도 넣지 않고 차를 타고 다니다가
길가에 서 있다고 전화가 오는 정도이다.
한번은 집에 혼자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 번호를 보니 실없는 소리를 잘하는 친구 전화다.
고집을 부리기로 작정을 했다.
열 번을 울려도 안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울리고 예순네번째 벨이 울리고서야 끊어졌다.
아내한테 내가 이겼다고 자랑했더니
벨 소리를 다 세어 봤냐며 혹시 급한 일일지도 모르는데
나 역시 고약하다며 한마디 나무란다.
하지만 남에 집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예순네번이나 전화벨을 울리는 사람보다 고약할까?
다시 전화가 왔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슨 일로 아까 전화했냐 했더니,
프로 야구시즌이 언제 시작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단다.
'빌어먹을……' 이란 단어는 이럴 때 나오는 것이다.
역시 세상사람 버릇을 다 내 기준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정을 좋아하고 연락 오는 친구가 반갑다.
그러나 화장실에 앉아 볼 일 중이거나,
아이들을 태우고 운전 중이거나,
극장 안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엇비슷하게 기대어
책을 보고 있을 때 오는 전화는 반갑지가 않다.
다행히 우리에게 이메일이라는 것이 있다.
이메일은 내게 당장 편지를 읽으라고 호통 치지도 않을뿐더러
당장 답장을 하라고 조르지도 않는다.
내가 편한 시간에 읽어 볼 수 있고
한가한 시간에 답장을 해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번 생각하고 대답해 줄 수 있을 뿐더러
원하지 않는 편지는 뜯어보지 않고 버려도 된다.
여러분!
급한 일이 아니면 이메일로 연락 합시다.
너무 급하게 달려가는 세상에 가끔씩 브레이크를
잡아 줄 때도 필요합니다.
김승호/세 아이의 아버지, 재미실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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