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대회장 앞에서 장애인들이 경기를 보러 다닐 이동권이 보장 안된 현실을 침묵시위로 고발하고 있다.
이즈음 2002 부산아태장애인경기대회는 관심사의 일부였다. 내가 아는 지인 몇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기원과 한편으로는 관객이 너무 없어 서글픔마저 들었다는 얘기를 얼핏 듣고 분노하기도 하는 참이었다. 내 관심과는 달리 먼 나라 얘기에 머물던 때 ‘장애인 처지에서 장애인경기대회를 취재해달라’는 <한겨레21>의 제의가 왔다. 부산, 부산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 세살 때와 몇해 전 한밤중 얼떨결에 가본 것이 전부인 부산이라는 이유와 역경에 굴하지 않은 영웅들과 동참한다는 것만으로 쌓인 일들을 잠시 접어둔 채 선뜻 제의에 응했다.
부산, 그 머나먼 길
사진/ 경기인가 동행인가? 11월1일 마라톤 경기 때는 도로 통제가 안됐다. 대신 선수가 나타나면 경찰이 따라와 호위해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머나먼 장거리 여행은 중증 장애인들에게는 가기 전부터 커다란 부담이었다. 먼저 동행할 자원봉사자를 찾는 일이 당면 과제였다. 나처럼 몸무게가 무겁고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을 1박하며 도와줄 사람을 찾기란 아시안게임 메달 따기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다음으로 현장에서의 이동수단이 문제였다. 수월한 취재를 위해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갔는데 그것이 내내 일정에 차질을 빚는 주범이 됐다.
마침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고 주말에는 목포로 내려가는 동료 간사가 도와주겠다고 응해줘서 일단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출발 당일 서울시청 근처에서 오후 늦게까지 해야 할 일들이 있어 항공기 예약시간을 오후 7시로 했다. 그런데 나를 도와주기로 한 동료 간사가 동행하지 못하게 돼 후배를 알아보고 있다는 연락을 해왔다. 어쨌든 지하철 공덕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을지로 입구역으로 갔다. 비행기 출발시간까지 충분히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느리기 짝이 없는데다 수시로 망가지는 휠체어 리프트로 인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역무원을 불러 리프트를 올리고 타고를 두번이나 거듭하며 승강장으로 내려간 시각은 이미 오후 5시30분. 충정로역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합실로 올라갔는데 승강장으로 이동하는 엘리베이터는 점검 중이었다. 한참 뒤 나타난 역무원은 아직 개통이 안 됐으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갈 것을 권했다. 다소 위험하기는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역무원 왈 다음은 계단이라 들고 내려가야 한단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역무원들이 총동원돼도 움쭉달싹하지 않아 전동 휠체어 바퀴를 계단에 부착한 상태에서 후진시키며 한칸 한칸 내려오는 위험천만한 서커스를 연출해 겨우 악몽같은 충정로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동료 간사의 부탁을 받고 시간을 내준 자원봉사자를 만나 김포공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오후 7시가 넘었다. 동료 간사가 비행기 시간을 30분을 늦춰놓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모든 계획을 접을 뻔했다.
그나마 쾌적했던 모텔
우여곡절 끝에 김해공항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당연히 출구가 청사쪽으로 연결될 줄 알았는데 계단이 연결돼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렸다. 결국 승무원이 업고 내려갔지만 몇달 전에 부러진 어깨가 아파왔다. 장애인 승객에 대한 대책이 없는 국제공항은 외국 장애인이 많이 방문하는 마당에 국제적 망신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낯선 사람의 등에 업혀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며 부산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아태장애인경기대회 사무국에서 공항에 봉사자를 파견했지만 그 시간에는 이미 철수한 상태였다. 마침 승합차를 운행하는 분과 협의가 돼 차에 타고 출발을 기다렸다. 그런데 차주인은 전동 휠체어가 너무 무거워 싣기는 하겠지만 내릴 때는 대책이 없다며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이전의 경험으로 남자 두세 사람이면 충분히 들어올리고 내릴 수 있었는데 차주가 도저히 못하겠다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급해진 우리는 콜밴을 물색했는데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아시안게임 사무국쪽에 특장차를 알아봤다. 다행히 차량이 연결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빗발은 더욱 굵어졌다.
현지 사정에 능한 차량 봉사자가 숙소를 알아봤는데 자정이 넘어 들어간 모텔은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은 듯 턱이 없고 경사로까지 있어 장애인이 묵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 곳이었다. 모텔 이름마따나 하루 동안의 여정이 몽블랑산맥 정상을 넘어온 듯 길게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개운한 기분으로 숙소를 나섰다. 메인스타디움에서 마라톤 출발을 취재하고, 오후 2시 농구 경기장으로 이동해 농구 경기와 농구장 시설을 취재하고, 폐막식을 취재할 청사진을 그려놓았지만 그건 꿈에 지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동래역에 내렸다. 동래역에서 메인스타디움까지는 5km 정도의 거리다. 동래역 앞의 역과 주경기장 사이를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있다고 해서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리프트가 달린 셔틀버스를 연상했지만 계단이 있는 일반버스였다. 장애인 방문객에게는 리프트가 달려 있는 특장차가 운영된다고 했다. 사무국쪽에 장애인 차량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폐막일이어서 모든 차량이 총동원된 상태라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이번 장애인경기대회를 맞아 전국의 장애인 특장차를 총동원했음에도 실제는 불충분한 모양이었다. 오전 10시 마라톤 출발 장면을 놓치고 마라톤 선수들이 동래역 앞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대기하고 있다가 주경기장으로 이동해 도착 장면을 담기로 했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휠체어 주자가 지나간 다음 일반 마라톤 주자들은 한참 뒤에야 하나둘씩 나타났다.
마라톤 출발장면을 놓치고…
사진/ 대중교통 이용은 메달 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지하철역 리프트는 잘 작동이 안댔고 특수장치가 된 차량은 모자랐다.
주경기장까지는 하는 수 없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자원봉사자를 전동 휠체어 뒤에 태우고 전력 질주하는 모습이 시민들에게는 특이한 장면이었는지 눈길이 일시에 우리에게 집중됐다. 마치 마라톤 주자라도 된 듯 쉬엄쉬엄 5km 거리를 달려가는 동안 강풍이 쉬지 않고 몰아쳤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 위에서 손이 얼고 급기야는 손가락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전동 휠체어 레버를 움직이는 일도 힘겨웠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간에 아침 겸 점심을 다급하게 해결하고 주경기장으로 향하는 데 바람이 더 세찼다.
농구 경기 결승이 있는 금정체육관으로 가는 것이 다음 일정이었지만 차질이 빚어졌다. 본래는 선수촌과 경기장과, 경기장과 경기장 사이에 장애인 차량이 운행됐지만 폐막일이어서 그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폐막식을 앞두고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몰려드는 인파 속 한 자리에서는 부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회원들과 이동권연대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었다. 장애인이 가기 힘든 아태장애인경기대회는 기만이라 외치는 이들의 구호는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축젯날에 웬 시위질이냐”는 지나가던 시민의 한마디는 세찬 겨울바람보다 매서웠다.
폐막식 취재로 잔뜩 기대에 부풀었으나 마지막까지 상황은 따라주지 않았다. 부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공항까지 차량을 지원해주기로 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폐막식 취재는 단 10분밖에 할 수 없었다. 어렵사리 구한 출입증으로 메인스타디움 안에 들어가 현장 분위기나마 느끼려 했지만 그나마 진입하려는 순간 경기 사무국 관계자가 복잡해서 위험하다며 출입을 막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폐막식도 제대로 못 보고 서둘러 나와야만 했다.
40개국에서 2420명이 출전해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부산아태장애인경기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은 보란 듯 금메달 62개, 은 68개, 동 60개로 중국에 이어 2위라는 위업을 이룩했다. 그러나 이동권과 편의시설, 문화향유 보장 등을 포함한 장애인 복지 수준은 장애인 선수들의 성적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대회 줄곧 불편함을 감내한 채 언론이나 대중으로부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대회를 치른 선수들이나 멀기만 한 경기장을 찾은 장애인 관람객들이나 모두 힘겹게 했던 주인 잃은 아태장애인경기대회는 아니었는지 반성할 일이다.
글·사진 이현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 간사·근육디스트로피 장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