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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비디오극장'의 추억

원문보기: [한겨레]

1983년 나는 서울 변두리 어느 신설 고교의 1학년 학생이었다. 햇살 따사로운 어느 토요일,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반가운 종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즈음, 학생주임 선생님의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들려왔다. “전교생은 5분 안에 운동장에 집합할 것.”

조금이라도 늦으면 매타작의 `시범 케이스’가 됨을 알고 있었던 학생들은 앞다투어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특수부대 출신으로 알려진 체육 선생님의 `지도’ 아래, 원산폭격, 팔굽혀 펴기, 땅바닥에 누워 팔다리와 고개 들고 오래 버티기, 오리걸음 등 평소 교련, 체육시간을 통해 연마한 `각종 묘기들’이 전교생에 의해 운동장 가득 펼쳐졌다. 조금이라도 꾀를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몽둥이를 든 선생님이 단상에서 내려와 엉덩이를 열 대씩 때렸다. 저러다가 애가 죽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력을 다한 매질이었다. 역시 `시범 케이스’였다. 우리들이 너무 지쳐 더 이상의 가혹행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무렵, 학생주임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부동자세로 서 있던 1200명의 학생들은 도대체 왜 이런 `기합’을 받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두려움을 안고, 절대권력을 지닌 전능자의 말씀을 기다렸다. 마침내 이 장엄한 분위기를 뚫고 나온 선생님의 말씀은 짧고도 분명했다. “‘88비디오극장’ 간 새끼들 나와!”

88비디오 정말이지 나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때 막 보급되기 시작한 야한 비디오들을 틀어주는 동네 소극장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어쨌거나 몇몇 순진한 친구들이 뭔가에 홀린 듯 제 발로 걸어나갔고, 뒤에 남겨진 우리는 엎드려 뻗쳐 상태에서 10여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잡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자수한 놈들이 다 불었다. 빨리 나와라”고 또 한번 명령하시는 순간, `혹시 친구들이 내 이름을 말했으면 어쩌나’ 하는 공포가 밀려들었다.

하루하루가 폭력의 연속이었던 학창시절을 보냈음에도, 유독 그 날이 기억에 뚜렷이 남은 이유는, “88비디오극장 간 새끼들 나와”란 명령이 갖는 희극성 때문일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15살 이상 관람가 수준에도 못 미쳤을 `음란’비디오, 그걸 보러 간 학생들과 그들을 잡겠다고 전교생을 삼청교육대 취급했던 교사들, 연대책임의 탈을 쓴 획일성의 폭력 앞에 말없이 순종해야 했던 우리들. 이제 가진 돈이 29만원밖에 안 남았다는 그 분의 `지도’ 아래, 전국이 병영화한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일이었다.

남들에게는 고교 시절의 추억담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부모님에게조차 맞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그 3년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리고 이때부터 갖게 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대학 교정으로 밀려들던 `백골단’의 무자비한 몽둥이질 장면과 결합해 제복에 대한 본능적 공포로 이어졌다. 길거리에서 검문하는 경찰을 볼 때마다 주머니 속의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며 `이제는 안심’이라 자위하는 현직 검사, 그게 바로 한때의 내 모습이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지난 수십 년간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력의 희생자들이었다. 고문과 전쟁뿐만 아니라, 가정·학교·병영·직장에서 일상화된 폭력에 장시간 노출된 우리 영혼은 빛바랜 사진처럼 태초의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나 같은 폭력공포증 환자가 되었고, 일부는 ‘지존파’ 같은 폭력불감증 환자가 되었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 나라가 온통 친북좌파들로 가득 찼다고 호들갑떠는 일부 언론이나 동료의 옷차림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국회의원들처럼 `획일성 속에서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된 특이한 유형의 희생자’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특이한 희생자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상처받으며 살아야 하는 운명은 우리 세대로 족하다. 이제는 일상화된 각종 폭력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 할 때다. “폭력은 누구에 의해 어떤 명분으로 저질러지든지, 그 자체로 악이다.”

김두식/변호사·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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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3-5-7 5:19 p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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